꿈에 본 이국청년, 신원파악해 추모비 세우는 일본 여배우 구로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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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모짱 작성일18-06-08 18:26 조회616회 댓글0건본문
특공대원 탁경현 추모비 세우는 지한파 日여배우 구로다 씨
‘평화스러운 서포에서 태어나 낯선 땅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친 탁경현. 영혼이나마 그리던 고향 땅 산하로 돌아와 평안하게 잠드소서.’(구로다 후쿠미 씨가 쓴 ‘탁경현 귀향기원비문’)
일제강점기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원으로 강제 징집돼 1945년 5월 11일 오키나와(沖繩) 해상에서 25세의 나이로 스러져간 조선 청년, 일본 논픽션 ‘호타루 가에루(반딧불이 돌아오다)’와 영화 ‘호타루’의 모델이 됐던 탁경현(卓庚鉉).
일본의 대표적 지한파(知韓派) 여배우인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51) 씨는 그의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16년 동안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 왔다. 오랜 열망이 결실을 봐 올해 안으로 탁경현의 고향인 경남 사천시 서포면 외구리에 추모비가 건립된다. 사천을 방문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에 들른 구로다 씨는 “최근 사천시로부터 추모비 건립에 대한 동의를 얻고 장소를 제공 받았다”고 밝혔다.
한일 합작 드라마에 출연하고 서울 가이드북까지 쓴 한국통이라곤 하지만 그가 생면부지 조선 청년에게 16년 동안이나 부담을 느낀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1991년 어느 날, 구로다 씨는 꿈속에서 낯선 조선인 청년을 만났다. 청년은 “나는 비행기를 조종한다. 전쟁에 나가 죽는 것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억울한 것이 있다면 조선인이 일본인의 이름으로 죽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꿈을 꾼 이후 머릿속에서 청년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알아봐도 청년의 정체를 파악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청년이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건 1995년. 요미우리신문에 꿈의 내용을 칼럼으로 쓴 뒤 결정적 제보를 받았다. 특공대원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미쓰야마의 사진을 보고 꿈속의 청년이란 확신이 섰다. 그의 한국 이름은 탁경현.
그때부터 자료를 뒤지고 다녔다. 교토(京都)에서 탁경현의 가계 자료와 소학교, 중학교, 교토 약학전문학교의 학적부까지 찾아냈다. 탁경현과의 기이한 인연을 운명이라 생각한 구로다 씨는 그의 고향에 비석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에 강제 연행된 한국인들의 신원을 찾는 데 노력해 온 홍종필(71) 전 명지대 교수를 만났다. 홍 전 교수를 통해 탁경현의 유족을 만나게 됐고 오키나와 ‘평화의 초석’(平和の礎·한국인 309명 등 태평양전쟁 전사자 23만8000여 명의 이름을 새겨 놓은 추모공원)에 탁경현의 이름이 들어 있음도 알게 됐다. 평화의 초석에 그의 한자 이름이 잘못 새겨진 것까지 찾아내 바로잡은 구로다 씨는 “잘못된 이름을 고쳐 달라고 꿈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 뒤 탁경현의 고향을 찾았지만 추모비 건립 작업은 쉽지 않았다. “당시 서포면에서만 한국 청년 250여 명이 강제로 끌려가 죽었는데 왜 탁경현만 비석을 세우느냐”는 반대에 부닥쳤다. 홍 전 교수와 함께 서포면을 방문해 진심 어린 설득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허락을 받게 됐다.
이미 비문까지 써 놓은 그는 건립 날짜가 정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큰 짐을 덜었지만 여전히 할 일이 있다. “오키나와 바닷가에서 산호를 하나 주웠는데 그게 꼭 탁경현의 유골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영혼을 달래는 의미에서 매일 물을 주고 있는데 비석을 세우는 날까지 계속할 겁니다.”
이광표 기자
‘평화스러운 서포에서 태어나 낯선 땅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친 탁경현. 영혼이나마 그리던 고향 땅 산하로 돌아와 평안하게 잠드소서.’(구로다 후쿠미 씨가 쓴 ‘탁경현 귀향기원비문’)
일제강점기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원으로 강제 징집돼 1945년 5월 11일 오키나와(沖繩) 해상에서 25세의 나이로 스러져간 조선 청년, 일본 논픽션 ‘호타루 가에루(반딧불이 돌아오다)’와 영화 ‘호타루’의 모델이 됐던 탁경현(卓庚鉉).
일본의 대표적 지한파(知韓派) 여배우인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51) 씨는 그의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16년 동안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 왔다. 오랜 열망이 결실을 봐 올해 안으로 탁경현의 고향인 경남 사천시 서포면 외구리에 추모비가 건립된다. 사천을 방문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에 들른 구로다 씨는 “최근 사천시로부터 추모비 건립에 대한 동의를 얻고 장소를 제공 받았다”고 밝혔다.
한일 합작 드라마에 출연하고 서울 가이드북까지 쓴 한국통이라곤 하지만 그가 생면부지 조선 청년에게 16년 동안이나 부담을 느낀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1991년 어느 날, 구로다 씨는 꿈속에서 낯선 조선인 청년을 만났다. 청년은 “나는 비행기를 조종한다. 전쟁에 나가 죽는 것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억울한 것이 있다면 조선인이 일본인의 이름으로 죽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꿈을 꾼 이후 머릿속에서 청년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알아봐도 청년의 정체를 파악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청년이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건 1995년. 요미우리신문에 꿈의 내용을 칼럼으로 쓴 뒤 결정적 제보를 받았다. 특공대원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미쓰야마의 사진을 보고 꿈속의 청년이란 확신이 섰다. 그의 한국 이름은 탁경현.
그때부터 자료를 뒤지고 다녔다. 교토(京都)에서 탁경현의 가계 자료와 소학교, 중학교, 교토 약학전문학교의 학적부까지 찾아냈다. 탁경현과의 기이한 인연을 운명이라 생각한 구로다 씨는 그의 고향에 비석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에 강제 연행된 한국인들의 신원을 찾는 데 노력해 온 홍종필(71) 전 명지대 교수를 만났다. 홍 전 교수를 통해 탁경현의 유족을 만나게 됐고 오키나와 ‘평화의 초석’(平和の礎·한국인 309명 등 태평양전쟁 전사자 23만8000여 명의 이름을 새겨 놓은 추모공원)에 탁경현의 이름이 들어 있음도 알게 됐다. 평화의 초석에 그의 한자 이름이 잘못 새겨진 것까지 찾아내 바로잡은 구로다 씨는 “잘못된 이름을 고쳐 달라고 꿈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 뒤 탁경현의 고향을 찾았지만 추모비 건립 작업은 쉽지 않았다. “당시 서포면에서만 한국 청년 250여 명이 강제로 끌려가 죽었는데 왜 탁경현만 비석을 세우느냐”는 반대에 부닥쳤다. 홍 전 교수와 함께 서포면을 방문해 진심 어린 설득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허락을 받게 됐다.
이미 비문까지 써 놓은 그는 건립 날짜가 정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큰 짐을 덜었지만 여전히 할 일이 있다. “오키나와 바닷가에서 산호를 하나 주웠는데 그게 꼭 탁경현의 유골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영혼을 달래는 의미에서 매일 물을 주고 있는데 비석을 세우는 날까지 계속할 겁니다.”
이광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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